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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n's Baseball/Baseball Column

<위클리이닝 칼럼으로 올린 글> [인맥사전] 강정호

by ♥Elen_Mir 2014. 5. 26.

1987년생으로 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2005년 2차 1번 전체 8순위로 현대 유니콘스에 지명되었다.  포수로 지명되긴

지만 광주일고 재학시절 팀 사정상 내야수, 포수, 투수 등의 여러 포지션에 기용되어 모든 포지션에서 무난한 모습

여주었다.

  그의 고3때 모습을 회상해보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정도였다. 선발투수로 출전

다가 경기 중반이나 위기 상황 시에 나승현이 등판하면 포수로 이동하고, 또 어느 순간 1루수 자리에 서 있었으니 

외야수까지 보게 되면 진정한 9 tool 플레이어가 나오는 거 아니냐고 주위 분과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2005년 제6회 아시아 AAA 청소년 야구대회에서 4번타자 1루수로 출전한 그의 활약 또한 인상적이었다. 상대 투수인

쓰지우치를 상대로 밀어친 타구가 땅볼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달려 내야 안타를 만들어냈고, 이

기폭제가 되어 상대 투수의 폭투로 추가점을 내는 등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게끔 해주기도 했다.

 

  프로 입단 후 2006년 김재박 감독의 눈에 든 강정호는 주전유격수로 낙점받게 되지만 아무리 재능이 있고 훈련을 열심

소화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유격수로의 실전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선수라도

러한 상황에서 그것도 신인 선수가 성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2군에서 차근차근 내야수 수업을 받은

 결국 2008년 우리 앞에 혜성처럼 나타나 116게임동안 2할 7푼 1리, 8홈런, 47타점을 올리며 골든글러브 후보에까지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승현 : 고교시절 강정호와 함께 배터리를 이루어 광주일고를 2005년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이끈 일등 공신이며 또한

강정호의 절친이다.  그의 1학년 시절 광주일고에는 김성계라는 에이스가 있었지만 그와 비교함에 손색이 없는 1학년

수가 많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이후 광주일고의 에이스 역할을 해주었으며 2005년은 나승현 야구인생 최고의 순간이

다.   

 

  2005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도 역시 에이스다운 투구로서 모든 경기의 선발투수와 구원투수로 출전하였고, 그 과정

속에서 강정호는 나승현의 뒤를 받춰 2선발로서의 역할, 포수로서의 투수 리드와 수비, 팀의 중심타자로서의 역할을 충

실히 해내며 성남서고를 10 : 0으로 꺽고 21년만에 대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나승현은 0.85의 방어율과 21탈삼진, 타율 0.411을 기록하며 대회 MVP에 올랐고, 강정호도  우수투수상, 타점상을 받으

며 빼어난 활약을 펼쳐주었다.
  결국 2005년 롯데 자이언츠로부터 2차 1지명 1순위로 지명되었다. 이 당시 롯데 구단은 류현진과 나승현을 저울질하고

있었으나 나승현은 2005년 당시 고교 최고의 투수였다. 대회도합 100이닝 이상을 던진 유일한 투수였고, 모든 타이틀 순

위에서도 위권에 랭크되어 있었으며 마인드 자체도 굉장히 좋은 선수였다. 류현진의 팔꿈치 수술 이력 또한 롯데에서

나승현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되었으리라. 

 

  2008년 5월 18일 사직에서 있었던 롯데 자이언츠와 우리 히어로즈 연장 11회 1:1 동점상황에서 1사 후 마운드엔 나승현,

타석에는 강정호가 있었다. 과거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만나는 순간 이들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승부는 결국 Hit by pitch ball로 강정호는 1루에 출루하고, 후에 투수 보크와 폭투를 묶어 득점까지 성공하면서 히어로즈

승리로 끝이 났다.

  지금은 서로 다른 곳에서 뛰고 있지만 이들의 앞날은 아직 창창하다. 과거와는 각자의 위치가 다르겠지만 언젠가 국제대

에서 이들이 다시 만나서 활약해보기를 기대해본다.

 

 

박진만 : 삼성라이온즈 유격수. 1976년생으로 인천고를 졸업하고 현대유니콘스에 입단한 후 FA를 통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대한민국 최고의 유격수이다.

  1995년 박진만을 영입하기 위해 현대 유니콘스의 스카우터 김진철 팀장은 인천지방 병무청의 신체검사장에서 강원도

주로의 납치(?)를 자행했다. 학연과 친분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대에 진학하려는 박진만을 설득하였지만 이동 도중

한 갈비집 화장실 창문을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등 현대 입장에서는 애타는 나날의 연속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고려대 합숙소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던 박진만에게 유급생의 대학생활이 얼마나 힘든지를 구구절절 설득하였고,

국은 그렇게 현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박진만의 최고의 장점 중의 하나는 타자가 타격을 하는 순간 타구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를 빠르고 정확하게 예측하는

이다. 박종호가 몇 년 전 박진만에 대해 타구 소리만 듣고도 타구의 방향을 재빠르고 정확히 캐치해내는 신기에 가까운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수비 범위가 더해져 다이빙캐치를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타구를 쉽게쉽게 처리하는 것이 장점이며, 침착한 성격

을 지하여 큰 경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강정호는 한국대표의 유격수 박진만의 계보를 이어줄 가장 가능성이 높은 후보 중 한명이다. 공교롭게도 박진만이 떠

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정호가 입단하였고, 그의 모습을 본 팀 관계자들은 박진만을 능가할 수 있는 재목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는데 비록 시작이 더뎠지만 그것이 2008시즌에 이르러서야 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유니콘스 V4의 중심에는 정민태와 함께 박진만의 명품 수비가 있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선전, 한국야구대표팀의

전에도 모두 내야 수비 중심에는 박진만이 있었다. 강정호 본인은 이런 박진만 선배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런 선배도 능가해보이겠다는 야심찬 포부 또한 숨기지 않고 있다.

 


황재균 : 강정호의 동갑내기 팀 동료이자 라이벌 경기고 출신의 히어로즈 내야수. 2005년 2차 3지명 24순위로 현대 유니

스에 지명되었고, 경기고 시절 2학년 추계대회부터 유격수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사실 2005년 지명현황을 보면 유격수 출신이 황재균, 신현철, 유재신 이렇게 세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이 세 선수와 기존

지석훈, 차화준 등의 선수가 경합을 벌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하지만 2008시즌 중반 멀티포지션이 가능한 강정호가

황재부진을 틈타 유격수 자리를 꿰차게 되고, 이때부터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황재균 역시 2007시즌 지석훈의 부진을 틈타 시즌 후반부터 유격수로 출전하기 시작하여 무난한 수비를 보여주었고, 특

3할 타율을 기록할 정도의 준수한 공격력까지 갖춘 그의 등장은 현대에겐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2008시즌 중반부터 수비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기록하면서 점점 슬럼프에 접어들었고, 야간 경기 시 난시로 인해

수비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사실 강정호와 황재균의 수비는 차이가 있다.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단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확실히 강정호의 물 흐르는

자연스러운 동작은 부드러운 글러브질에서 비롯된 포구부터 송구동작까지의 간결함에서 나온다, 수비 범위 또한

황재균보다는 다소 앞서있다고 볼 수 있지만 황재균은 빠른 발을 이용한 순발력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 두 선수 훈련 모습

을 보면 강정 순발력 위주의 훈련, 황재균은 스텝과 포구 동작 위주의 훈련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이리라...


  신인 시절 2군 경기에서 주로 유격수로 출전한 강정호는 3할2푼3리, 73안타, 37타점을 기록하며 이승주에 이어 팀내 타

2위를 기록했고, 3루수 출장이 잦았던 황재균은 최종타율 2할 5푼에 62안타 35타점을 기록했지만 시즌 중반까지만 해

3할 이상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좋은 활약을 해주었다.  결국 두 선수의 이때 모습이 멀지 않은 미래의 1군 무대에서

재현않을까...

    


허세환 : 강정호의 고교 대선배이자 광주일고 감독. 선동열 삼성 감독과 광주일고 동기동창인 허 감독은 광주일고 재학 당나가는 유격수이자 1루수로 종횡무진 활약하여 1980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수훈상, 타점상, 최다안타상,

타격상, 도루상을 휩쓴 유망주였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인하대에 스카우트 되었으며 1985년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대학졸업 당시 인대를 다

부상을 당하면서 의사의 만류로 인해 실업팀 포항제철에 입단하여 8년간 선수생활을 하였다. 

 

  이후 1992년 광주일고 코치로 하여 그해 10월부터 감독에 역임되면서 현재까지 우수한 많은 선수들을 배출하였다. 

허 감독 입장에서는 3학년 서재응·김상훈, 2학년 김병현, 1학년 최희섭이 주축이 된 1997년과 3학년 강정호·나승현·김성현,

2학년 김강·조성원, 1학년 서건창이 주축이 된 2005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이었을 것이다.  

허 감독은 평소 기본기, 체력, 인성 등의 세 가지를 중요하게 여겨 이 점을 선수들에게 각인시켰고, 강정호 역시 스승의 뜻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팀 상황에 따라 자신의 포지션이 아닌 여러 포지션을 옮겨다니면서 나름의 어려움을 겪었을텐데도 문제없이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우수한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호남 지역 출신이라 하더라도 스승의 이러한 가르침이 없었
지금의
강정호도 이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서정환 : 현 MBC ESPN 해설가이자 기아 타이거즈 전 감독.

  1982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가 쟁쟁한 유격수 후보가 많아 주전으로 출전하기 어려워지면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해태 타이거즈 내야 수비의 핵이었고, 공수 양면으로 알토란같은 역할을 하며 5우승 반지를 끼는데 일조하였다. 또한 1990년 해태 수비코치를 맡으며 2회 우승을 더 추가하기도 했으나 감독직을 맡고 후에많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선수 시절 해태 타이거즈의 주전 유격수였지만 리그 전체에서는 김재박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빛에 가려 리그 최고의 유격는  수 없었다.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를 명문팀으로 이끈 핵심 멤버였으며 현재까지도 해태의 후신 기아에 대한 남다으로 유명한 분이다. 

 

  서 위원은 강정호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사적으로 매우 잘 아는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 위원 코치 절부광주일고 강정호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2006년 플로리다 스프링캠프에서 만나 무려 100달러의 거금(?)을 용돈으로 챙겨주기도 했다. 

  현대가 지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기아 유니폼을 입었을 것이다. 거에 덧신인 부터 여러 포지션을 소화해주는

강정호를 볼 때마다 자신의 프로 시작 때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즈키 이치로 : 강정호가 가장 존경하는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의 외야수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말이 필요 없는 천재 타자이다.

  NPB 7년 동안 3할 4푼의 타율로 리딩히터와 베스트 9, 골든 글러브를 꾸준히 수상하였으며, 2001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2001시최다안타와 도루 1위, 최우수신인상, MVP, 2004시즌 타율 1위, 2005, 2006, 2008시즌 골든글러브, 2007시즌

스타MVP, 최다안타 1로 메이저리그까지 정복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일본의 WBC 2연패를 위해 2006 WBC에 이어 2009 WBC에도 참가하여 대회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다. 2006

론을 통해 한국팀에 대한 민감한 기사가 나왔고, 그 기사를 읽은 많은 한국인들은 분노했지만 그만큼 일본야구자부심이 강하다반증이기도 하다. 반면 언론과의 관계는 원만치 못하여 직접 인터뷰할 수 있는 기자는 단 3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실 이치로와 강정호는 포지션도 다르고, 팀에서 처한 상황자체도 많이 다르지만 두 선수의 고등학교 시절 때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닮은 구석도 엿보인다.
  이치로가 약팀에서의 에이스였단 점을 제외하고는 두 선수 모두 팀의 중심타자로서의 중책을 훌륭히 수행해주었고, 투

수로서도 꽤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얼마 전 이치로가 WBC의 투구수 제한 규정 때문에 투수수업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만약 강정호도 WBC에 출전하여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매우 흥미진진한 대결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분좋은 상상을 잠시 하기도 했다.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 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을 가리켜 천재라고 한다면 나는 해당하지 않는다. 노력한 결과로 무언가 할

되는 사람을 일컬어 천재라고 한다면 내 경우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노력도 없이 공을 칠 수 있다각한다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라고 말하는 스즈키 이치로...

 

  “내야 전 포지션에 걸쳐 연습을 많이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한 포지션만 나가든, 여러 포지션으로 나가든 상관없다", "실력, 노력하면 따라온다는 것을 지난해에야 깨달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강정호...

 

  혼신의 노력은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은 그이기에 앞으로도 그 점을 잊지 말고 꾸준히 정진한다면 이치로 못지 않은 대한민국 대표의 선수,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선수가 될 지도 모른다.

 

 

< 사진 출처 : 서정환 위원 - 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 / 스즈키 이치로 - 로이터 통신 / 허세환 감독 - 뉴시스>

 

[한진경, Elen(엘렌) dkvm94@naver.com / 200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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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내가 이렇게 오글거리는 글을 쓰다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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