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가 3년 만에 전 세계적으로 개봉되었다.
그의 전작인 「테넷」 에서 주인공과 프리야의 대화 중에 맨하탄 프로젝트 그리고 오펜하이머가 언급되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이번에 개봉한 영화의 주요 소재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면서 혹시 다음 영화의 소재가 될 인물이 또 언급될까가 개인적인 관심사였고, 그 주인공은 존 F. 케네디였다. 거의 막판에 언급되어 실제 다음 영화의 주제가 될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물론 이번에 전기 영화를 만들어서 다음 영화는 그렇게 가진 않을테고, 만약 케네디에 관련한 영화가 만들어지면 스릴러 형식의 암살 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전혀 다른 주제일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지만 말이다. :)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의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그리스 신화에서 인간들에게 불을 가져다 준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받아 평생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은 신)에 관련된 이동진 평론가 영상과 알쓸별잡이란 프로그램에서의 맨하탄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보았다. 어떤 이들은 왜 영화 관람을 위해 공부까지 해야 하냐며 짜증을 낼 수 있지만 사실 어떤 작품을 보든 사전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기도 하고, 장르적인 특성을 봤을 때 전기 영화는 어느 정도의 지식은 필요하다.
일단 대중적인 스타들이나 아주 유명한 위인들(우리 입장에선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등)의 전기 영화의 경우는 워낙에 미디어에서 많이 접하고 여기저기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많으니 큰 공부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 외 역사적인 인물의 경우는 알아봤자 딱 그 인물의 대표적인 헤드라인 정도만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 역시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드라마나 영화를 오락성에 치중해서 보는 이들에게는 지루할 수 있다. 반면, 지적 활동에 대한 갈증이 있거나, 인간 내면 심리와 역사, 정치 등의 사회적인 메시지를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다.
본인의 경우, 이 팍팍하고 힘이 빠지는 삶을 완벽히 헤어나올 수 있게 만드는 도구가 저 후자의 요소들이다. 그렇게 완벽하게 작품 속으로 들어가서 몰입해야 이 싫증나는 현실을 거의 완전히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어려운 주제를 좋아할까란 의문이 있었는데 테넷을 보면서 이 근본적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나의 열등감을 채우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지적인 정보를 습득하고 활용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꼭 해야할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아마도 놀란 감독이 뭔가 나와 생각하는 매커니즘 자체가 비슷한 것처럼 느껴져서 단순히 코드가 맞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 또한 든다.
어쨌든 아직 1차 관람밖에 하지 못해서(개봉 2주차 주말에 용산 아이맥스 관에서 2차 관람)모든 걸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사전 학습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는 만큼 더 많이 보인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고나 할까!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는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이자 교수였다.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학습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하버드 대학교 화학과를 조기 졸업하였고, 언어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화학 전공을 했으나, 양자 역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트 컬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로 유학을 떠났는데 실험 물리학과는 도통 맞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 과정에서 지도 교수인 패트릭 블랙킷(Patrick Blackett)을 독살하려고 사과에 시안화칼륨을 주입했다가 닐스 보어(Niels Bohr)가 그 사과를 먹으려고 하자, 벌레 먹은 사과라며 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덴마크, 원자 구조의 이해와 양자역학의 성립)의 추천을 통해 막스 보른(Max Born, 독일, 파동 함수의 통계적 해석)이 있었던 독일 괴팅겐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서 스펙트럼 양자론을 공부하였다. 당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독일, 불확정성 원리), 볼프강 파울리(Wolfgang Ernst Pauli, 오스트리아, 파울리-배타 원리), 유진 위그너(Wigner Jenő Pál, 헝가리계 미국인, 원자핵과 기본 입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이탈리아, 중성자 충격을 통한 유도 방사능 연구 및 초우라늄 원소)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젊은 물리학자들과 함께 공부했다.
당시 미국은 약자역학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던 상황이라 오펜하이머가 돌아오자마자 버클리 분교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기서 어니스트 올란도 로렌스(Ernest Orlando Lawrence, 미국, 사이클로트론)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의 큰 전환점이 된다. 그를 통해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시기, 괴팅겐 대학교에서 은사인 막스 보른이 추방당한 것에 충격을 받아서 추방된 유대인 물리학자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며, 노조 운동을 하다보니 반나치즘과 반파시즘의 좌익계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 애인이었던 진 태틀록(Jean Tatlock), 아내인 캐서린 오펜하이머(Katherine Oppenheimer)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로렌스가 이를 많이 걱정했던 이유가 매카시즘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였기에 이것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로 인한 일들이 영화에서 상세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맨하탄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가 시작된 건 독일이 원자 폭탄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였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서 우라늄 235와 238 중 우라늄 235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에너지가 발생하는데 여기서 또 중성자가 나오면서 연쇄적인 반응에 의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우려한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Szilárd Leó, 헝가리계 미국인, 핵 연쇄반응 발견)와 유진 위그너가 미국 정부에 이를 알려야한다고 생각하면서 편지를 썼고, 당시 가장 유명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독일계 미국인, 상대성이론)의 서명을 받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 육군 공병대의 장교인 레슬리 리처드 그로브스 주니어(Leslie Richard Groves Jr.)가 최고 책임자로서 로스 알라모스에 비밀 연구소를 건설하고, 13개 주 37개 시설과 12곳의 대학 부설 연구소 등을 설립하면서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진행되었다. 총괄적인 관리를 레슬리 그로브스가 했다면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실제 원자폭탄 개발과 동료 물리학자들을 관리하는 감독자 역할을 했다. 알쓸별잡에서 김상욱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날고 기는 천재 과학자들을 관리한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로브스 역을 맡았던 맷 데이먼도 인터뷰에서 그들을 어린 아이들(유치원생)처럼 대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여느 작업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도 많은 난관이 있었는데 그 문제를 적재적소로 원만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봤을 때 그렇게 자만심에 가득찼던 사람이 타인을 아우르며 일이 진행되게끔 만드는 리더쉽이 상당히 놀랍게 느껴지기도 했다.
앞에 언급되었던 실라르드 레오와 엔리코 페르미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우라늄과 흑연의 원자파일에서 자립적으로 핵반응을 일으키는 최초의 중성자 반응로를 개발했고, 당시 주니어 물리학자이자 유머러스한 악동 리처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미국, 양자 전기역학•양자컴퓨터), 이론 부분 책임자였던 한스 베테(Hans Albrecht Bethe, 독일계 미국인, 핵물리학), OP의 절친이자 후에 프로젝트 책임자가 된 이지도어 라비(Isidor Isaac Rabi, 폴란드계 미국인, 핵자기 공명 발견), 레이더를 개선시키고, 음파 탐지기 개발을 책임졌던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 미국, 아날로그 컴퓨터 선구자), 핵분열 에너지 계산과 폭탄 설계에 관여하면서도 영국과 소련의 이중스파이 역할을 했던 클라우스 푹스(Klaus Emil Julius Fuchs, 독일계 소련) 등 물리학도들이 매우 기뻐할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의 참여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트리니티 실험에서 포신형인 우라늄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와 내폭형인 플루토늄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의 시연에 성공한 후, 각각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면서 수십만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태평양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듣기론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아마 미국이 안했으면 소련이 했을 거라는 설도 많이 있는 거 같은데(시기는 좀 늦었겠지만 소련도 핵폭탄 발명 중이었다고 하니) 어찌되었든 이로 인해 제 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이 영화에서 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루이스 스트로스(Lewis Liehtenstein Strauss)이다. 평소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며 신발 사업으로 자수성가하고, 후에 FBI 국장이었던 존 에드거 후버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군에서 행정업무를 수행하다가 미국 냉전 핵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1946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원자력 위원회(AEC)의 첫 5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하였다. 1950년 AEC를 떠난 후 1953년 2월 선출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를 원자력 고문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오펜하이머를 더 이상 위원회의 컨설턴트로 두지 않는 것이었다. 스트로스가 이런 과정을 어떻게 만들어나가는지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입자가 빛을 내며 반짝거리는 장면과 OP(오펜하이머)의 시시각각 보이는 다양한 표정들 그리고 핵분열되어 폭발하는 이미지를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놀란 감독은 그를 원자폭탄에 비유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원자의 전자와 핵이 차분하게 존재하는 형태에서 중성자가 개입하면서 핵을 분열시키는 그 시퀀스를 그가 처한 상황에 맞춰 대입해서 보여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은 스트로스가 핵융합, 즉 수소폭탄에 대입된 부분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리뷰를 보면서 깨달았는데 OP와 스트로스 둘을 대척점으로 두면서 사용한 장치가 원자폭탄(핵분열), 수소폭탄(핵융합)인 것이다.
OP는 원자폭탄 개발에 대해서는 본인 또한 유대인이었기에 나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써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폭발력이 어떤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목표 하나만으로 후에 불러올 후폭풍들보단 나치를 처단하는 게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러나 수소폭탄은 이야기가 다른 게 원자폭탄은 우라늄, 플루토늄같은 특정 광물에서 체취되는 것이지만 수소폭탄은 이 지구상에 가장 많이 존재하는 원자가 수소이기 때문에 더 많이 모을 수 있어 폭발력이 훨씬 더 강할 수 밖에 없다. 프로젝트를 이탈하려는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헝가리계 미국인, 수소폭탄의 아버지)를 달래는 방식으로 연구 자체는 계속하게끔 하지만 내심 그 폭발력을 매우 우려했던 듯 하다.
여기서 OP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원자폭탄은 개발해도 되지만 수소폭탄은 안된다는 점(둘 다 무서운 무기임에 분명하지만), 프로젝트에 못마땅해하는 텔러를 붙잡았으면서도 연구는 계속하게 한 점 등 프로젝트 진행 중에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과학자 중에서는 에드워드 텔러가 루이스 스트로스의 편에 서서 OP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 되었고, 청문회에서 그의 답변으로 더 두드러졌다. 이에 아내 키티 오펜하이머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말이다.
스트로스의 상무장관 청문회는 흑백으로, OP의 보안취급인가 청문회는 컬러로 연출한 것도 꽤 인상적이었다. 각 챕터에 맞는 과거의 이야기를 그릴 때도 컬러를 사용하긴 했지만 스트로스의 대다수의 장면은 현재 시점의 청문회이기도 해서 이동진 평론가의 말씀처럼 현재는 흑백, 과거는 컬러로 상징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듯 싶다. 이 과정에서 현재-과거의 장면을 수시로 오가는 연출력은 참으로 경탄할만했다. 놀란 감독의 특유의 시간 플롯으로 인해 눈을 뗄 수 없었고, 숨막히는 긴장감이 느껴졌다고 할까... 특히 후반부 스트로스가 열등감을 폭발시키는 장면은 아주 압권이다.
이 영화는 첫째로 김상욱 교수님 말씀처럼 물리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헌정되는 영화이고, 둘째로 역사와 정치에 관심이 많은 모든 이들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영화이며, 세번째로 인간 내면의 불안한 심리와 양면성, 합리화 등을 세련된 연출력을 통해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영화이다.
놀란 감독은 그의 대부분의 영화에 물리학적인 요소를 많이 결합하였고, 그로 인해 호불호도 갈리긴 해도 많은 대중들을 과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인터뷰에서 양자역학을 더 잘 알고 싶고, 킵 손 교수님에게 과학적인 부분에서 많은 컨설팅을 받는다고 하지만 킵 손 교수님이 쓴 「인터스텔라의 과학」에서 보면 굉장히 과학적인 이해도가 높아 본인을 깜짝놀라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대목이 있다. 어쨌든 인문학도인 본인조차 놀란 감독의 이런 성향 덕분에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업적이란 말인가!!
어릴 때 사실 역사를 잘하지 못했다. 시험만 보면 역사와 한문에서 점수를 하도 많이 깎아먹어서 아주 질린 적이 있는데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토막토막 알고는 있어도 세계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몇 년 전에 타임슬립물 중 하나인 미국드라마 《Timeless》를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미국 건국부터 현대까지의 역사적인 내용을 토대로 이걸 누군가가 결과를 바꿔놓으면 어떻게 될지에 대하여 설득력있게 그려냈다. 매우 흥미진진한 작품이었으나, 미국 역사를 수박 겉핥기로 조금씩 알게 되는 그 자체도 즐거운 기억이었다.
이 작품도 20C 초반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양자역학과 그와 관련된 물리학자들을 다루고 있고, 제 2차 세계대전부터 냉전 시기까지의 역사 안에서 물리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이용되는지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매카시즘을 앞에 언급한 미드 《Timeless》에서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존재하는 색깔론은 그저 이 곳만의 특성인 줄 알았던 나의 착각을 산산히 부서준 계기가 되었다. 1950년 미국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미국 공화당 당원 집회에서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으며, 297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계기가 되어 1950년대 매카시즘이 성행하게 된 것인데 실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평소 자유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도와준 OP(공산주의자는 아님)가 이 활동만으로 인해 낙인이 찍혔고 그 고초를 겪는 과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하다.
많은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간의 그 내면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대부분의 일에서는 선하고 이타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도 어떤 특정 사안에서는 불안함과 날카로움을 노출하고, 매우 계산적이면서도 냉정한 사람은 또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인류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OP의 경우는 본인과 비슷하게 천채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은 존중하지만 평범한 이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진 태틀록을 사랑하지만(물론 이 여성도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서 실타래처럼 엄청 꼬여있고 복잡한 면모를 가지고 있던지라 누구든 감당이 안되긴 했을거다.) 프로포즈를 거절당한 뒤에는 캐서린 퓨닝(Katherine Puening)과 결혼했다. 괜찮은 결혼생활을 한 듯 하지만 OP는 여전히 진을 사랑하고 있었고, 키티도 그건 알고 있었다. 인가 취급 관련 청문회에서 진과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되는데(아마 이 곳에서의 선정적인 장면은 청문회 위원들에 의해서 본인이 발가벗겨지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륜을 저지른 그 날 이후 OP는 키티에게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또한 핵폭발의 위력을 알면서도 개발을 계속해나가는 건 나치에 강하게 대항하는 행동의 하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본인이나 가까운 이들은 직접 겪지는 않는 일이니 애써 무시해온 게 아닌가 싶다(물론 나치는 그 전에 패망했지만). 하지만 실제 원폭의 피해 상황을 접하면서 그 때가 되어서야 후회하고, 미국 정부가 수소 폭탄 개발을 추진시키는 걸 강력하게 막는 모습까지 보면 모순점이 가득한 인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스트로스도 마찬가지다. 자수성가하여 그 자리까지 올라간만큼 과학과는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OP에 의해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당한 걸 못 견뎌했다.
상무장관에 무난히 이르기 위해 청문회 전 OP에 대한 공작 작업을 하며 주도면밀한 정치력을 보여주지만 데이빗 힐 박사의 발언(힐도 OP에게 거절을 당한 사람 중 한 명이지만 OP의 고뇌를 처음부터 이해했던 것인지 스트로스를 열등감 가득한 인간으로 그려냈다.)으로 그의 꿈은 무참히 부서져버렸다.
세계적인 위치 속에 미국 권력의 강화를 위한 애국자로 행동하지만 실상 개인적인 복수심이 더 커보였고, 상원 보좌관조차 그의 열등감을 간파하며 점점 더 OP를 이해하는 입장으로 선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OP와 스트로스의 첫 만남 때 아인슈타인이 OP와의 대화 후에 스트로스를 그냥 지나쳐가는데 실제로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모르면서 지레짐작으로 본인에 대한 험담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 아인슈타인은 OP에게 비범함에서 평범함으로 전락당하는 걸 앞으로 느끼게 될거라는 경고를 했다.
또한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을 가장 많이 응축해낸 장면 혹은 주제 의식을 함축한 장면이 저 장면이다. 1947년 스트로스가 OP에게 AEC 자문위원으로 위촉하는 장면에서 가진 아인슈타인과 OP의 만남......
오펜하이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역량이 집대성된만큼 본인 역대 최고의 영화가 아닌가싶다. 메멘토,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까지 그의 영화에서 보여줬던 연출력과 킬리언 머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등 많은 배우들의 명연기, 탄탄하고 짜임새있는 플롯까지 단연 나에게도 No.1이 될 역대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벌써부터 오스카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는 거겠지만......
물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플라워 킬링 문'이(칸 영화제인가 오픈한 거 같던데) 가장 유력하다는 평이 있지만 그래도 오펜하이머에서도 몇 개의 트로피는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정말 완성도 높고 쫀쫀하게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단연코 말할 수 있다.
2차 관람을 끝내면(오렌지색 글자로 추가)또 어떤 깨달음을 얻을지 사뭇 궁금하지만 일단 여기서 감상평을 마무리지으려한다. 아마 아이슬란드 여행 가기 전까지 한두번 더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n차 관람을 불러오는 놀란 감독의 다음 작품이 또 무엇이 될지 더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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