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19 작성]
박연이 본 세종....
『'책을 숭배한 조선의 음악가' 난계 박연은 책에 실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음악이론서를 신봉해 적힌 그대로 악기를 제작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풍수서적을 믿고 승문원 터, 즉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서 황제가 날 것이라 확언하는 그의 얼굴에서 책 숭배자 박연을 볼 수 있다.』
조선의 황종음을 찾는 일 그것이 세종이 박연에게 내린 제1의 과업이었다. 소리를 변화시켜 곡조가 있는 음으로 만들고 그 음에 춤을 포함시킨 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음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1차, 2차의 율관 제작에 실패하고, 또 3차 율관 제작에 실패하면서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고, 4차 율관을 제작하면서 그나마 명나라의 악기와 거의 같은 소리를 내는 등 약간의 성과를 보였는데 실패했을 때도 조금씩 진전되었을 때에도 상은 다독여 주었다 한다. 3,4차때는 명나라의 음악 수준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앞서고 있다고 격려해주면서 조선의 자연환경과 백성들의 정서를 담은 '황종음'을 찾아낼 수 있도록 더 전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다.
박연이 이해할 수 없었던 세종의 음악 정책은 여악 사용론인데 명나라의 사신들이 우리나라의 높은 예악 수준을 보고 찬탄하다가도, 여악이 함께 사용되는 것을 보면 늘 혐의쩍게 여기곤 했고, 신하들도 그리 생각했던 듯 하나 그래도 남악과 여악이 같이 쓰이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부인들의 방중 풍악이 중국 사람들에게는 천해보일지도 모르나 오랫동안 내려운 우리의 전통이며,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상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결국 재위 15년 설날 아침의 회례 음악에서 황종궁의 정음이 울려퍼졌고, 결국은 율관 제작에 성공하였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굳이 나를 온천까지 데리고 가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의 행차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당신은 내게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우리 조선의 자연의 소리를 느끼며, 군신들의 호흡을 담아서 그야말로 '조선의 음악' 을 발견 할 것을 기대하고 계셨다. 그리고 바로 그 음악을 적을 수 있는 악보와 악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지상 과제로 주셨으며, 당신께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백성의 소리를 담은 당대 최고의 음악정치를 펼치려 하신다는 깊은 뜻을 내 나이 70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정인지가 본 세종....
『세종 12년 세종시대 '문형(최고학자)'은 역시 정인지였다. 문학, 어학, 역사, 천문학, 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말을 한문으로 적을 때의 부자연스러움은 시간이 지나거나 공부를 더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세종대왕은 명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경에 '생도들을 보내 중국의 음훈을 학습시키려' 하고, 강이관과 별재학관을 증설하여 생활비를 주면서 중국말 배우기를 권하였다.
『글 배우는 사람은 문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옥사 다스리는 자도 그 곡절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이 이유 때문에 정음 28자를 창제하였고, 세종대왕은 후자인 옥사를 없애는 데 초점을 맞춘 것에 비해 정인지는 전자인 한자를 배우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들, 그리고 언제까지 중국의 학문을 수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한글 창제의 이유에 있어 두 사람의 우선 순위는 다르긴 했지만 공통적으로 한글 창제의 필요성은 모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만리 등 사대주의자들에게는 결코 탐탁치 않은 정책이었고, 한글을 창제하면서의 과정이 굉장히 어려웠음은 물론이었다.
『 "너희들이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중국말과) 다르지 않으냐" ....
당신이 이두를 만든 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그 점에서 정음 창제 취지와 다를 바가 없는데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라고 비판하셨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오랜 시일이 걸려 만든 한글을 우리는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그때는 중국어가 우리나라에겐 세계공통어였지만 현재는 영어가 세계공통어이다. 어쩔 수 없는 국제 정세는 있겠지만 그렇다해도 한글을 쓰는 것보다 외래어를 쓰는 것이 더 교양있고 세련되어 보인다는 핑계를 대며 우리 한글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신하 중에는 상서(좋은 징조)를 말하기 좋아하는 자도 있고, 재변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오로지 상서만 말하고 재변을 말하지 아니하면 어찌 가하겠는가. 상서를 만나면 상서를 말하고, 재변을 만나면 근심과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옳다."』
치우치지 않는 정보를 가지고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려는 것이 주상의 의도였다. 그러기 위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돌아보고 그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했는데 앙의 궁궐 밖 출입은 제한이 있었기에 그 임무를 정인지에게 내렸다.
1436년의 작황이 정인지 부임 일년 전의 흉년보다 덜하다고는 하지만 실제 백성들이 느끼는 고통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조정에서는 세금을 더 걷지 못해 안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무능한 관리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세금 독촉을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이것을 두고 신인손 등이 정인지를 탄핵하려 한 것에 대해서 세종대왕은
『"정인지는 근시로 있으면서 문학에 전임하고 정사에는 경험이 없지만, 내가 듣건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다고 하더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정인지가 15개월의 걸군(문과에 합격한 사람이 부모를 공양하기 위하여 고향의 수령 자리를 청하던 일)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극심한 효심 때문이었다. 세종 본인도 상왕 태종의 효성 뿐만이 아니라 대비(원경왕후)에 대한 효성은 아주 극진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 좋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다 실행했었으나 결국은 흥하였고, 그에 "임금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혜친 후, 발을 벗고 부르짖어 통곡" 하였다.
1448년 '동국정운'이 배포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정음'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했다. 4년 전 최만리 등은 정음을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 라고 비판하며서 "언문의 시행"을 저지하는 데만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세종의 전략은 최만리 등이 문과 시험에 매달려 있는 동안 신숙주 등에게 '동국정운'을 편찬하게 하면서 최만리 등의 생각을 뛰어넘고 있었다.
『전해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해 각각 고증과 빙거를 두어 바른 음에 맞게 하시니, 옛날의 그릇된 습관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
<동국정운 서문>』
『신숙주가 쓴 서문에 언급된 것처럼, 당신은 한문을 배우는 첫걸음부터 뜯어 고치고 계셨다. 신숙주의 말처럼 "글의 뜻을 알기 위한 요령은 마땅히 성운부터 알아야 하며, 성운은 곧 도를 배우는 시작이다." 그런데 국가에서 표준음을 정하고 훈민정음에 따라 발음하도록 한 상황에서 어느 유생이 정음을 계속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토대로해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한다. 예악이 중요한만큼 향악도 필요하고, 중국의 역법이 있듯이 조선에 맞는 역법과 시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비로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음 창제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상 본인 자신이었다고 정인지는 기록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는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훈민정음 서문>"는 말처럼, 훈민정음은 정말로 배우기 쉬운 문자였다.... 그야말로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언어를 알게 된 다음부터 나는 중국의 고전들을 더 잘 읽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이 체화하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 명나라 사신 예겸과 훈민정음의 체득 효과로 인해 음운과 운자를 가지고 승부를 겨룬 끝에 그 이후의 중국 사신들이 태도가 달라졌다 한다. 그 전에는 거만한 태도로 우리를 깔보거나 따져 묻는 식으로 말하던 그들이 정책과 문물에 대해 의논하기도 하고, 뇌물조차도 사양하기까지 했다. 즉, 우리 자존감의 회복이라는 큰 수확을 거둔 것이다.
정말 세종대왕의 명석한 두뇌와 학식, 그리고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안목까지... 정말 성군 중의 성군이자 최고의 지식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인지같은 최고의 학자의 명석함까지 뛰어넘은 세종은 대체 어떤 사람인 것인가.... 정말 놀랍기만 하다.
수양대군이 본 세종...
『수양대군(1417~1468)은 그리 길지 않은 재위 기간(1455~1468)에 많은 업적을 남긴 군주이다. 우리나라의 지리지와 지도를 찬수하게 하는가 하면, 호패법을 시행했으며, <경국대전>을 찬술케 했다. 과전법을 개혁해 현직 관원에게만 과전을 주는 직전제를 시행했으며, 건주위의 이만주를 목베는 등 여진족을 토벌했다..... 패륜과 비극의 도랑을 피하지 않고 과감히 뚫고 들어간 그는 뛰어난 업적으로 자신의 정통성 결함을 만회하는 한편, 조선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시대의 군사훈련, 강무 때 수양대군의 강무에서의 활약, 강무의 방식 등등 여러가지 문제점 등을 술회하며 수양대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창업에서 수성의 정치로의 전환이 세종대왕이 생각하는 시대적 과제였다는 것을 수양대군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말 위의 정치' 에 익숙한 사람들은 '좌상의 행정' 에 서툴렀다. 하여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보다는 자신의 일터로 돌려보내 각자 소임을 다하게 해야 했고, 비판하기보다는 일의 결과를 가지고 혜택을 베풀어주어야 했으며,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 일상의 사무가 원활히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 중요해졌다. 정치도 마찬가지로 권도보다는 정도로의 전환이 중요해졌다. 세종은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국가 정책을 발표하기에 앞서 '숙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수성의 정치를 가로막는 더 큰 장애물은 신진 유신들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한다. 유교 이외의 모든 사상을 배척하려 했던 것이다. 재위 중반기의 풍수지리 논쟁에서도 그렇고, 성리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척불논쟁 등등이 그것이다. 세종대왕은 경연에서 풍수지리에 대해 강론할 수 있도록 유생들을 설득하였고, 주자의 말이라도 다 믿을 수는 없다면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을 뿐더러 불교 개혁론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종종 불교를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위 말년 창덕궁 문소전 서북쪽 공터에 불당 건립 지시를 내렸고, 이것으로 인해 세종과 신하들의 갈등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신료들과 유생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은 마지막 카드로 세자에게 선위할 뜻을 내비치면서 임영대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결국은 내볼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수양대군은 문종의 병약함을 생각하며 왕위 계승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 하다. 재위 32년 중국 사신의 영접을 본디 국본이 해야 하는데 문종의 병환으로 인해 수양대군이 대신하게 되면서 왕위 찬탈의 동기 부여를 여기서 얻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비록 그 과정은 더러웠을지라도 세조가 큰 업적을 이룬 것만은 분명해 보이니...
김종서가 본 세종...
『세종의 신하 중에서 유일하게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1452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해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이 사실이 세종이 그에게 얼마나 좋은 울타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육진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이자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지이기도 하였다.』
1450년 세종대왕이 흥하신 날 김종서에게 세종은 어떤 존재였는가를 회상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머니 산' 무악! 아이를 업고 집을 나가는 어미 모양의 인수봉을 달래기 위해 이름 붙였다는 어머니 산. 나는 그 산 고개에서 새삼 '내게 주상은 어떤 분이었던가'를 생각해본다. 상은 실상 내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상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 이라고 나는 믿었고 그대로 따랐다.』
파저강 토벌을 위한 대토론이 시작되면서 첫번째 사안은 명나라에 보고할 것인가, 두번째는 토벌을 감행할 것인가, 세번째 언제, 어떻게 토벌해야 하는가였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의심스럽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래로 원로대신들과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서 그 물정이 귀착되는 대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결정이라 여겼다. 토론을 하다가 좋은 의견이 나오면 그 것에 힘을 실어서 실행하였고, 그 외 제반사항도 숙의과정을 통해 결론짓도록 했다.
파저강 토벌의 진행이 착착 진행되고 출병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세종은 온행길을 선택했다. 이 선택이 많은 신하들을 의아하게 만든 부분인데 다름이 아닌 이 일은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미 파저강의 여진족들은 여연 침범 사건 때문에 조선의 보복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이미 조선의 북정에 대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제 아무리 최윤덕이라해도 그 공격은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뜻하지 않는 때를 틈타 공격" 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조정이 해야 할 급선무였다. 귀화한 여진족 중에 이만주의 간첩이 없지도 않았기에 대규모 온천행이라는 속임수를 쓴 것이었다.
북정 후에도 세종대왕은 그 후속 대책을 논의함에 게으르지 않았고, 그 후 육진을 개척하면서 백성들을 이주시켜 대비했다. 이주시키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지만 아마 이렇게하지 않았으면 북방의 전투는 종종 게속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파저강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제수했다. 본인은 무신의 집에서 나고 자라서 손오의 병서를 간략히 익혔을 뿐이라며 극구 사양했지만 신료들과 여러가지 제반 조건들을 의논해서 이런 인사를 결정했다.
역시 세종대왕은 능력만 있으면 문벌과 신분 고하를 초월해서 인재를 등용했다. 어찌보면 정말 그 시대에 너무나 앞선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분이 아니셨을까.... 정말 지금 시대에 필요한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리움마저 든다....
『"명나라 태조가 백두산을 고려에 예속시킨" 사실을 확인하셨다. 그리고 "백두산 앞쪽의 옛 성터를 찾아내 우리나라의 경계로 삼아서" 백두산 전체를 우리의 산으로 만들려 하셨다.』
신숙주가 본 세종....
『보한재 신숙주(1417~1475)는 성삼문과 대조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절개를 지킨 충신이데 반해 신숙주는 권력의 추이에 따라 태도를 바꾼 변절자('숙주나물')이라는 평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종 치세의 핵심 인물이었다. 1439년 문과 급제 후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주요 핵심 멤버였고, 1442년 서장관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동제국기>를 남겼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는 성삼문과 더불어 요동을 열세차례나 왕래했다.』
신숙주의 입장에서 왜 수양대군의 편에 섰는지에 대한 어쩌면 변명일 수도 있는 사견들로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이 변명 아닌 변명을 보면서 요즘 시대에는 이렇게 사는게 정말 현명한 것인데 이 사람도 어쩌면 시대를 잘못 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뭐 세조의 총애를 받고 순탄한 삶은 살았겠지만 자신의 친한 벗 성삼문 등을 잃을 수 밖에 없었던 고통이 매우 컸으리라 짐작하니까...
어쩌면 죽을 때에도 그 일이 두고두고 사무쳤을 수도 있었겠지 싶다. 사람은 자기가 받은 상처는 쉽게 잊을 수 있을지언정, 남에게 준 상처를 오히려 더 못 잊는 법이니...
『내가 무장이 아닌 사람으로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김종서 대감의 덕분이었다. 김 대감은 6진을 개척하면서 조정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 함께 북변의 정황을 세밀히 조사해서 세종께 보고하곤 했다. 그 보고서를 만들 때 김 대감이 빠르게 구술하면 내가 붓을 잡고 즉시 받아 적곤 했다. 김대감은 그 글을 보고서 감탄하기를 " 내 문장도 실로 자부하는 바이지만, 그대의 글 재주 또한 쉽게 얻기 어려운 문장" 이라고 칭찬하곤 하셨다.<연려실기술>』
사실 신숙주의 이야기에서는 세종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세종 때부터 세조때까지의 신하들의 이야기와 수양대군(세조)의 이야기가 거의 다이다.
다만 성삼문과 신숙주가 다른 길을 걸어야 했었던 그 사건들을 자세히 다뤄주고 있다는 것이 어찌보면 세종대왕의 최대 약점, 다음 왕조의 계승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주지 못해 이렇게 아픈 역사를 그 자손들이 만들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조가 본 세종....
『조선의 22대왕 정조(1752~1800)는 세종과 더불어 가장 자주 거론되는 임금이다. 우리 역사의 '전성기'와 중흥기'의 군주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우선 정조는 세종의 집현전을 벤치마킹해 싱크탱크 규장각을 만들어 인재를 길렀고, 학문을 좋아해 문예부흥의 시대를 열었다. 백성들의 말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 한 애민군주라는 점도 같다... 신분과 당파를 초월해 인재가 발탁되고 중용되던 '인재의 융성기'였던 세종의 시대를 정조는 재현하고자 했다. 그런데도 정조의 정치가 세종의 그것보다 종종 한 수 낮게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정조가 즉위한 때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왔던 노론과 소론, 남인의 대립각이 큰 때였다.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입으면서 남인의 세상이 되었고,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당시의 서인)은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후 노론은 '국혼은 절대고수' 를 당론의 제일 원칙으로 삼아 그 자리를 자기 세력 중에서 찾되 세력이 미약한 집안에서 왕비가 선발되도록 했다.
그래서 왕세자의 스승이 누가 되느냐, 누구의 딸이 세자빈이 되느냐가 굉장한 이슈였고, 기대하고 있는 노론의 그 기운을 틈타 '간택'이 아닌 '중매' 방식을 택하겠다고 기습적으로 선언했다. 후보자 물색 과정에서부터 정조의 의중에 반영될 수 있도록 규칙을 바꾸고, 그 의지를 관철시켜 결국 김조순의 딸이 세자빈이 되었다.
정조가 본 세종의 모습은 재위 19년의 역사를 서로 비교하며 쓰여져있다. 정조는 재위 19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해로 보냈다 한다. 1795년 모처럼 노, 소론 및 남인이 의정부와 육조에 고루 배치되어 있었고, 특히 심환지와 이시수와 이가환이 형조, 병조, 공조의 판서로 나란히 앉아 국사를 돌보는 탕평정국의 모습이었다. 이 시기에 수원 화성의 공사가 다시 착수되었고, 1월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올렸다.
그래서 고모 화완옹주를 석방하고, 강화도에 유배 간 이복동생 은언군을 볼러옴으로써 거대한 신료집단과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는 대신 64명에 이르는 나주목의 기민을 구제하는 일에 마음을 쏟고, 휘화의 죄수들을 25명이나 제멋대로 장살한 가혹한 수령을 단속해야 했던 때였다. 무엇보다 권유와 박장설 등이 천주교 문제를 제기해 남인을 축출하려 했을 때 서학의 본질과 장단점을 다루었어야 했는데, 7월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으로 좌천보내고, 이승훈을 예산현에 정배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반면 세종의 재위 19년... 이 때 역시 중요한 시기였는데 정사를 위임하고 '기민을 구휼'하며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한편, '대외 문제를 예방' 하는 일을 했다 한다. 이조와 병조 등 군국의 중대사는 세종이 맡되, 그 나머지 작은 일들은 세자가 처리하도록 하였고, 그보다 한 해 전에 의정부 서사제의 개편을 통해 잡무로부터 벗아나 훈민정음 창제 등 중요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김종서를 함길도에 보내 육진 개척을 주도하게 하고, 황희에게는 공법이라는 세제 개혁을 논의하게 했으며, 이천과 장영실 등에게 전담시킨 과학 기술의 개발이 결실을 맺어 보루각이라는 자동 인형을 만들고, 흠경각이 완성된 것도 이때였다.
『무엇보다 세종께서 기근을 구제하신 방법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천재와 재이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 다만 구휼하는 조치는 사람에 따라 잘할 수도 있고 잘 못할 수도 있다"』
이처럼 판중추원사 안순의 제안과 즉위 초년 황희가 강원도에 행했던 사례를 토대로 기민구휼 장소를 남자와 여자, 환자와 건강한 자를 구분해서 설치하고,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묻지 말며, 아전이 아니라 마음 착한 중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일을 맡길 것이며, 구휼과 관련해 포상과 상벌을 시행해 수령과 아전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고, 관찰사에게 그 일을 위임하게 하는 구휼 원칙을 만들어 시행했다.
또 식량 증산을 위해 농사직설을 전국에 반포하게 하여 수령들로 하여금 억지로 가르치고 일러서 농사를 짓게 하라고 지시했고, 조정에 잘된 작물들을 상납하면 다시 돌려주며, 그 종자를 다시 심어서 더 많은 작물을 얻도록 지시했다 한다.
또한 일본국 내부의 권력 다툼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밀려올 것을 대비해 무비를 갖추게 했고, 여진족을 피해 우리나라에 도망쳐온 중국 사람 지원리와 김새승 등 7인을 후대하여 장영실로 하여금 금은을 제련해 신물질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하기도 했다.
즉, 정조는 하지 않아도 될 일에만 몰두하고, 정작 해야 할 것을 등한시 했던 그 재위 19년이 나중에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신을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고 자책하고 있다.
에필로그...
나중에라도 잊었을 때 다시 보기 위해 리뷰를 남기는 습관을 근 1년 정도 들이면서 이번에는 너무나 긴 장문의 글을 쓰게 되었다. 모두 책에서 따온 내용이고 아주 약간만 나의 생각이 덧붙여있을 뿐 솔직히 정말로 방대한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거 같다. 그냥 가볍게 쓰자는 것이 너무나 글이 길어졌지만 그래도 나중에 이 것을 봤을 때 다시 상기시키는 데는 보다 충실한 내용이 된터라 노력한 보람이 있을 듯 싶다.
어쨌든 세종대왕의 업적은 우리가 알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무시무시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물론 사람이 모두 장점만 있을 수는 없듯이 세종도 재위 말년의 척불당 논쟁을 그러한 소모전까지 가는 것은 좀 그의 명성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고, 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왕위를 둘러싼 신경전, 계유정난... 이 모두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아쉽긴 하다. 더더군다나 태종의 국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장인인 심온을 처형할 때 꼭 그런 식으로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난 사실 의문이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고...
하지만 대소신료들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철저히 경계하고 토론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사고와 몇 시대는 앞서나가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음은 물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시키는 궁극의 리더십을 가장 잘 보여준 지도자가 아니었나 싶다. 가장 아래로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나라에도 극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앞 세상을 내다보는 안목도 대단한 분이셨고... 무엇보다도 한글의 위대함과 우수성은 정말로 우리 후손들이 아끼고 가다듬어야 할 큰 과제일 것이다. 나부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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