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Escape/마음의 양식

[도서 리뷰(Review of Book)] 스티브 잡스 (Steve Jobs)

♥Elen_Mir 2018. 4. 9. 19:22

 

 

 

 

"어릴 때부터 항상 저 자신이 인문학적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자 공학도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영웅 중 한 명인 폴라로이드 사의 에드윈 랜드가 한 말을 읽었어요. 인문학과 과학 기술의 교차점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의 중요성에 관한 얘기였는데 그걸 읽자마자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했지요."

 

(I've always thought to have humanities tendency myself since I was a child. But I also loved electronic engineering pretty much. Then one day I had read words to say Edwin Land who is one of my hero of Polaroid Corporation. It was a story about importance of people who can stand intersections between humanities and science technology, I determined I become person like that as soon as I read that.")

 

 

 

이 시대의 한 획을 그은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스티브 잡스의 삶을 기록한 이 책은 그에 대한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또는 포장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의 양면성을 모두 다루었다. 처음 그의 이름을 접했을 때, 난 사실 별 감정은 없었던 것 같다. 기계와 친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이팟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도 했고, 유행을 따르는 그 행동 자체에 반감도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한 아이패드의 출시가 애플 그리고 스티브 잡스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원인이 된 것 같다.

 

책을 계속 읽으면서 나와는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그에게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으나, 왠지 모르게 그의 여러 가치관 중 '인문학과 과학 기술의 교차점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의 중요성'과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완벽주의적인 성향' 그리고 미적 감각은 내 성향과도 꽤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난 그처럼 대단한 추진력이나 창의성을 가진 것 같지는 않지만 이상하리만치 그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1) 잡스의 어린 시절과 실리콘 밸리 초창기 (Childhood of Jobs and the beginning time of Silicon Valley)

 

 

 

 

스티브 잡스는 폴 라인홀트 잡스와 클라라 잡스에게 입양되었다. 친부모는 조앤 시블이라는 위스콘신주 독일계 여성과 시리아 출신의 무슬림 위스콘신 대학교 정치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압둘타파 존 잔달리였고,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태어났다. 당시 조앤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 태어난 후 입양시킬 수 밖에 없었는데 폴과 클라라는 그 사실을 잡스에게 숨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버림받음, 선택받음, 그리고 특별함' 이것이 잡스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실리콘 밸리의 상징이 된 '차고' 가 사실 1938년 데이빗 패커드와 빌 휼렛이 최초의 제품인 오디오 발진기를 개발한 공간이고 그렇게 1950년대에 HP는 기술장비 제조 기업로 빠르게 성장했다고 하며 그 후 스탠포드 대학교 공대 학장 프레더릭 터먼이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상업화할 수 있는 민간 기업을 위해 대학 부지에 280만 제곱미터의 산업구역을 조성하였다. 이것이 실리콘 밸리의 시작이다.

 

"자라면서 이 곳의 역사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그 일부가 되고 싶었지요."

 

(Steven Paul Jobs was adopted into Paul Reinhold and Clara Jobs. Biological parent was Joanne Schieble being a German-American woman of Wisconsin and Abdulfattah John Jandali who was Muslim graduate student of a political science department of Wisconsin University from Syria, Jobs was born on Feb 24 in 1955. Then a couple had a situation that can't marry by opposition of Joanne's father, so they had to put him up for adoption, Paul and Clara didn't hide the fact to him. Therefore 'to be deserted, to be selected and distinction' became a part of Jobs' identity.

 

In fact 'garage' becoming signature of Silicon Valley was a space that David Packard and Bill Hewlett develops a stereo oscillator being the first product in 1938, HP quickly progressed technology manufacturing like that in 1950s, after that, principal Frederick Terman in engineering department of Stanford University built 2,800,000㎥ industry quarter in university site for private enterprise which can commercialize students' idea. This is the beginning of Silicon Valley.

 

"I grow up and got a lot of inspiration in history of this place. So I wanted to become the part, too.")

 

 

 

잡스는 그의 아버지 차고에서 전자 공학의 기초를 배웠고, 깔끔하면서도 질 좋고 저렴한 주택을 공급했던 부동산 개발업자 조셉 아이클러의 디자인에서 애플 컴퓨터와 아이팟의 비전이 생성되었다. 또한 같은 동네에 살던 엔지니어 래리 랭의 차고에 종종 방문하여 전자기기를 구경했고, 랭은 HP 탐구자 클럽에 잡스를 들어가게 했다. 잡스가 주파수 계수기를 만들 때 필요한 부품을 HP CEO 빌 휼렛에게 연락하여 얻어내면서 여름방학동안 HP 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신문배달과 전자기기 상점에서 재고품을 정리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전자 부품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협상과 이익 창출을 열정적으로 갈고 닦을 수 있었다.

 

잡스보다 5살이 많은 스티브 워즈니악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출신 프랜시스 워즈니악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공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어떠한 경우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철칙을 따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며 큰 욕심이 없는 성격이다. 잡스보다 공학적인 면은 훨씬 더 뛰어났던 천재로 당시 통신사 네트워크의 신호를 복제하여 장거리 전화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블루 박스의 디지털 기계(프리커라고 하며 현재는 범죄로 간주)를 함께 만들어 판매하며 우정을 키웠다.

 

 

 

 

 

애플 Ⅱ부터는 PCB만이 아닌 케이스와 키보드, 전원 공급 장치가 갖춰진 완제품 형태로 출시하기로 했다. 제리 매넉이 단순하고 깔끔하며 친근감이 느껴지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완성했고, 로드 홀트는 애플 정식 직원으로 합류하여 오실로스코프를 비롯한 여러 기기에 사용하는 스위츠식 전원 공급장치를 제작했다. 1초당 60회가 아닌 수천회나 전원을 개폐하기 때문에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전력을 저장하고 열도 그만큼 적게 발생하여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워즈의 뜻에 따라 확장 슬롯을 8개 포함하기도 했다.

 

제품을 출시하기 전 홍보와 마케팅 그리고 유통을 잘 아는 마이크 마쿨라를 영입하면서 보다 더 체계적으로 사업 계획을 할 수 있었다. 애플의 마케팅 철학은 공감과 집중 그리고 인상이었다.

 

"마이크는 제게 보호막같은 존재였어요. 저와 가치관도 굉장히 비슷했고요. 그는 절대로 돈을 벌겠다는 목표로 회사를 차려서는 안된다고 여러번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쏟아부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 오래도록 생명력을 지닐 회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요."

 

(Apple Ⅱlaunched complete product equipped case and keyboard and Power Supply Unit not only PCB. Jerry Manock completed plastic case feeling simply and tidy and familiar, Rod Holt entered into Apple staff and PSU of switch style to use some equipments including oscilloscope. PSU saves electricity for very short time and generates less heat as that has been used it these days cause it opens and closes power supply thousands of times not 60 times per 1 second. It was included 8 expansion slots by Woz's wish.

 

Jobs employed Mike Markkula who knows promotion and marketing and distribution well before launching product and could do a business plan more systematically. Marketing philosophy of Apple was sympathy and concentration and impression.

 

"Mike was a existence like protective film to me. He was very similar with my value. He emphasized many times  it has never to open a company for a goal earning money. He said making something which can pump own beliefs and company which has life force for a long time have to take an objective."  

 

 

 

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PC를 위한 최초의 인터랙티브 스프레드시트(여러가지 도표 형태의 양식으로 사무 업무를 자동화한 소프트웨어)인 비지칼크를 출시했고, 한동안 애플 Ⅱ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One software corporation launched VisiCalc being interactive spread sheets at the first for PC, could use only Apple Ⅱ for a while.)

 

 

 

 

 

(3) 혁신의 시작 (Start of innovation)

 

 

 

 

애플 Ⅱ는 워즈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잡스는 '잡스의 컴퓨터'라고 인정받는 컴퓨터를 갖고 싶었다. 더욱이 그는 젊을 때부터 오래 살지는 못할 거 같다고 주위에 이야기하고 다닐만큼 이 세상에 본인의 이름이 남길 수 있는 의미있는 것들을 더 간절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1979년에 애플 Ⅱ를 이을 세가지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었고, 바로 애플 Ⅲ와 LISA 프로젝트, Annie라는 저가형 컴퓨터 프로젝트였다. 여기서 Annie 프로젝트를 위해 제록스 팰러앨토 연구센터를 방문했는데 이 곳은 첨단 기술과 디지털 아이디어를 개발하기 위해 1970년 설립된 곳으로 앨런 케이가 이 곳의 선구적 인물이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최고의 방법은 스스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하드웨어를 만들어야 한다" 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긴 인물이다.

 

1979년 제록스 벤처투자부문이 애플에 투자하기를 원해 그에 대한 문의를 했고, 잡스는 PARC의 핵심 기술에 접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을 하나 걸었던 것이다. 이 곳에서 정말 귀중한 아이디어를 하나 얻게 되는데 현재 컴퓨터 사업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기술이었다. 그 이전에는 DOS라고 텍스트 기반 인터페이스였으니 이 GUI가 미래의 산업이 될 엄청난 기술임에 틀림 없었다. GUI는 컴퓨터들을 연결해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작동 방식, 그래픽 인터페이스와 비트맵 방식이 사용되어 다양한 디스플레이를 구현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의미심장한 도둑질"과 "제록스가 실수한 것" 이렇게 두 가지의 평가가 나오는데 모두 일리있는 말이다. 다만 시인 앨리엇의 말처럼 "구상과 창조 사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마련이다"라는 말처럼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제록스가 먼저 GUI 기반 컴퓨터를 출시했지만 실패했으니 말이다.

 

(Jobs wanted a computer to recognize 'Jobs' computer' cause Apple Ⅱ was considered Woz's computer. Besides I thought he had sincerely wanted to create valuable something which can remain his name in this world as he had said he won't live for a long time from his young age.

 

Three project was proceed to connect Apple Ⅱ in 1979, these were just Apple Ⅲ and LISA and low-price project called Annie. They visited Xerox Palo Alto Research for Annie project, was established for high technology and development of digital idea in 1970, Alan Kay was pioneering person of here. He remained the famous saying "The best way to predict future is what create own future.", "Person who thinks importantly software has to create own hardware by itself"

 

In 1979, Xerox venture investment part wanted to invest for Apple and asked about that, Jobs had one condition that requests to be able approaching to core technology of PARC. They had really gotten precious idea here, it was 'Graphic User Interface' technology which can never miss in computer business these days. It was used text user interface like DOS before, GUI has been sure great technology being industry of future. GuI can compose network system connecting computer and computer, is used object-oriented programming and graphic interface bitmap method and can embody various display.

 

There were two assessments "meaningful stealing" and "mistake of Xerox" like this in this business world, all both things are reasonable. But As the poet Elliot's saying "There is a shadow between the idea and the creation", there is no meaningful if idea doesn't actualize. Because Xerox launched a computer based GUI at the first, but they failed.)    

 

 

 

애플은 제록스가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GUI를 더 개선시켰다. 제록스의 마우스는 버튼이 3개였고 조작하기 복잡하였으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았으며 단가가 300달러에 달했는데 애플은 버튼이 하나인 마우스를 15달러의 단가로 디자인하였다. 게다가 드래그 앤 드롭 기능과 더블 클릭 기능을 만들었고, 세련된 아이콘을 추가하였으며 창의 상단에 있는 바에서 메뉴가 아래쪽에 펼쳐지도록 만들었다.

 

LISA 프로젝트에서는 빌 앳킨슨이 화면을 검은색이 아닌 흰색으로 하고 위지윅(모니텨 화면으로 보이는 내용과 동일한 인쇄 출력 결과를 얻는 방식)을 시도하였으며 맨 앞의 창이 그 뒤에 있는 창들 뒤로 겹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스크롤을 강조하며 상하좌우가 아닌 어떤 방향으로든 커서를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볼 마우스 또한 개발했다.

 

진보적인 스타일과 보수적인 HP 스타일의 엔지니어들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1980년 9월 구조 조정이 되었는데 존 가우치가 리사 프로젝트 전담 책임자가 되면서 잡스는 통제권을 잃었다. 게다가 대외적인 대표기는 했어도 경영에 직접적인 통제권을 발휘할 수 없는 자리로 가게 되면서 프로젝트 진행에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이 생기기도 했다. 잡스가 가진 "현실 왜곡장(스타트랙이라는 드라마에서 따온 단순히 거짓말이 아닌 훨씬 더 복잡한 유형의 조작 행위)"과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깨달은 사람' 또는 '멍청한 놈') 부분이 동기 부여 측면에서 좋은 효과를 볼 때도 있었지만 반면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초래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책임자 제프 래프킨에 의해 Annie 프로젝트가 '매킨토시'로 불리게 되었고, 일반인들을 위한 컴퓨터를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리사 프로젝트에서 쫓겨난 잡스가 매킨토시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둘의 갈등이 심화되어 래프킨은 회사를 떠났다. 과정 자체가 래프킨이 희생양이 된 거 같지만 이사회가 이렇게 결정한 일이었다.

 

 

 

 

 

잡스는 훌륭한 산업 디자인이 회사와 제품을 차별화하는 주요 요소라고 믿었고, 외관 뿐만이 아니라 내부도 중요시했다.

 

"아름다운 서랍장을 만드는 목수는 서랍장 뒷쪽이 벽을 향한다고,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싸구려 합판을 사용하지 않아요. 목수 자신은 알기 때문에 뒤쪽에도 아름다운 나무를 써야 하지요. 밤에 잠을 제대로 자려면 아름다움과 품위를 끝까지 추구해야 합니다."

 

(Jobs believed wonderful industrial design is main element differentiates company and product, also put a high value inside part including outward form.

 

"Carpenter who makes beautiful drawers doesn't use cheapie plywood even though the back of drawers toward a wall and nobody can see. Because carpenter knows by itself, he uses beautiful wood. If it goes to sleep well at night, it has to seek beauty and dignity to the end.") 

 

 

1984년 1월 24일 제18회 슈퍼볼 중계일의 3쿼터 초반 LA 레이더스가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상대로 터치 다운을 성공시킨 그 직후, 리플레이 장면 대신 애플의 매킨토시 광고가 나갔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에 빗대 나온 이 광고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티브이 가이드>와 <애드버타이징 에이지>가 뽑은 이 시대 최고의 광고로 선정되면서 광고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으며 출시 행사 프리젠테이션도 애플의 상징이 되었다.

 

(In the early 3 quarter of the 18th Super Bowl's broadcasting day of January 24 1984, Macintosh advertisement of Apple had came instead of replay after LA Raiders succeed touch-down opposite Washington Red Skins. This advertisement liken to novel of George Orwell '1984' had created huge sensation and was selected the best advertisement of this generation by <TV Guide> and <Advertising Ages>, opened a new prospect in the advertising history, presentation of launch event also became simbol of Apple.)  

 

 

 

 

 

(4) 넥스트 그리고 픽사 (NeXT and Pixar)

 

 

 

 

애플에서 여러가지 압박을 받았던 잡스는 사임하고, 교육 시장의 컴퓨터를 만들 목적으로 넥스트를 설립하였다. 나중에 출시된 넥스트 컴퓨터에 전자사전, 시소러스(동의어, 반의어, 어원과 활용을 보여주는 어휘집), 옥스퍼드 인용구 사전도 포함되어 검색 가능한 전자책의 초기 개념을 구현했고, 옥스퍼드판 셰익스피어 전집도 담았다.

 

그러던 중 루카스 필름 컴퓨터 부문 상당 부분을 매입하여 회장직을 맡았으나, 실제 운영은 에드 캣멀과 존 래시터에게 일임하였다. 잡스는 컴퓨터 그래픽이 굉장히 발전할 것이라 믿어 1,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미지 컴퓨터와 렌더링(2차원의 화상에 광원, 위치, 색상 등으로 사실감을 불어넣어 3차원 화상을 만드는 과정을 뜻하는 컴퓨터 그래픽 용어) 소프트웨어, 애니메이션이나 그래픽 같은 멋진 콘텐츠까지 생산하였다. 

 

원래 수익은 하드웨어에서 발생하기로 되어있었다. 픽사 이미지 컴퓨터는 애니메이션 제작자와 그래픽 디자이너, 의료산업(CAT 스캔 데이터를 3차원 그래픽으로 표현), 정보 분야(정찰 비행, 인공 위성으로 얻은 정보를 3차원으로 처리)에 판매하였으나, 레이스라는 렌더링 프로그램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이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자동화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가동하여 픽사는 CAPS라는 맞춤 제작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개발하였고, 1988년 '인어공주'의 마지막 장면에 처음 사용되었다.

 

 

 

 

 

존 래시터는 「안드레와 꿀벌의 모험」 으로 연례 컴퓨터 그래픽 컨퍼런스에서 호평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단편 애니메이션 「럭소 주니어」 로 댈러스 시그래프 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 후 「틴 토이」 로 1988년 아카데미 단편 영화상을 수상하였고, 컴퓨터 제작 영화로는 최초였다고 한다. 이런 그를 디즈니에서 영입하려 했으나, 픽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해서 픽사와 디즈니가 함께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자금 사정때문에 디즈니와의 계약 내용이 불리한 점이 있긴 했어도 존 래시터가 총 지휘한 「토이 스토리」 가 총수익 3억 6,200만 달러를 올리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어떤 제품이든 그 나름의 본질적인 역할과 만들어진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앞으로 디즈니와의 계약 관계에 있어 자금이 필요했기에 잡스는 기업 공개를 단행하였고, 그렇게 공정한 계약을 다시 맺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픽사가 제작한 「벅스 라이프」 와 「토이 스토리 2」 그리고 「몬스터 주식회사」 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니모를 찾아서」 는 세계적으로 8억 6,8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하며 당시 최고 기록이던 「라이온 킹」 을 넘어섰고,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하였다.

 

잡스는 자신과 같은 혁신적인 예술가들을 사랑했으며 그들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세심함 뿐만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그래서 그 결과 과거에 비해 좋은 작품을 거의 만들지 못했던 디즈니(좋은 작품이 있어야 디즈니 랜드나 캐릭터 상품 등 그에 파생된 시장 유지가 가능)가 74억 달러의 엄청난 주식으로 픽사를 인수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픽사 밑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합병된 기업은 래시터와 캣멀이 함께 운영하게 되었다. 물론 픽사의 독립성도 유지되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