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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리뷰]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1

♥Elen_Mir 2014. 6. 25. 09:35

[2008.10.19 작성]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저자
박현모 지음
출판사
푸른역사 | 2007-05-14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의 다면적 모습황희, 김종서, 정인...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평소 역사에 관심이 별로 없었던 나로서는 정말 획기적으로 나를 역사라는 분야에 뛰어들게 만든 유일한 분 세종대왕...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단 한 분도 존경을 느낄만한 분이 없었고, 확실히 애국자는 아닌 거 같은 것이 도대체 이 나라가 왜 존재하는지 의문점마저 갖고 자라왔었던 거 같다.

 이런 나에게 이분의 일생을 보며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마냥 안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현재도 살기 각박하고, 돌아가는 꼴이 전혀 좋지 않긴 하지만.....

 

 모든 역사서가 마찬가지겠지만 이 책 역시도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쓰여졌으며, 세종의 아버지 태종, 신하들 중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김종서, 신숙주 그리고 아들이자 왕자 수양대군, 그 후의 조선의 22대왕 정조 등 다양한 시각에서 본 세종대왕의 정치와 업적, 그의 일생을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태종(이방원)이 본 아들 충녕(세종)이 모습...

 

 개인적으로 동정이 약간 가는 부분은 있으나 비호감으로 생각하는 조선의 3대왕 태종(이방원)이 본 충녕(세종)대군의 모습....

 본디 왕세자이자 국본은 양녕대군이었으나 너무나 아버지와 닮아있는 무인의 모습에 주색에 빠져있었던 터라 장자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원칙을 깨고 폐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충녕은 완전한 책벌레에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아버지 태종이 정말 바라고 있는 문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고, 더더욱이나 고려가 멸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나라를 정리할 수 있는 능력, 즉 태종이 발견한 국가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후일에 반역을 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될 공신들과 외척들을 철저히 제거해왔고, 후에 충녕에게 왕위를 계승해주고 나서도 자신의 충신인 강상인의 옥사를 통해 충녕의 장인 심온을 제거하기에 이르렀으며 심온의 딸 소헌왕후(중전)까지 폐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을 때도 세종은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보고 태종은 그가 생각하는 국가의 의미를 양녕이나 원경왕후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세종은 이해하고 있었다고 여겼던 듯 하다.

 

 솔직히 태종의 이런 모습을 난 지금도 솔직히 이해할 수도 없고, 짐승만도 못한 잔인함의 극치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고려의 잔존세력과 새로운 왕조 사이의 가중된 혼란 속에서는 이러한 행동들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러한 태종의 설거지 작업때문에 세종은 자신의 가치관대로 조선을 이끌 수 있었을 지도... 현재의 평가도 그렇고 말이다.

 


  다음으로 위인전에서 많이 봐왔을 세종 시대의 성실하고 정직한 재상 황희 정승...

 

『세종에게는 "세상을 이끌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가진 정승" 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당시 신하들은 "심술이 바르지 못해 반대자를 중상하고 뇌물받기 좋아하는 황금 대사헌" 이라 비판했다. 과연 어떤 것이 황희의 실제 모습일까?....  한 마디로 황희가 세종의 신뢰와 보호 덕택에 청백리로 거듭났다면, 세종 역시 황희의 보필로 '동방의 성주' 가 될 수 있었다.』

 

 황희의 시각에서 쓰여진 내용들은 대부분 태종의 이야기이고, 태종때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대마도 정벌부터 양녕 페위, 태종 승하 전 다시 관직 복귀 등등....양녕이 국본에서 폐위될 때 황희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일단 보위에 오르면 잘해낼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양녕의 폐위를 필사적으로 막았었다. 아마 드라마에서도 나왔듯이 어지러운 조선 초기 때 국가의 안정을 위해 더욱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양녕이 폐위되고, 그의 편에 선 황희는 관직에서 파직되어 6년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1422년 태종 승하 직전 세종에게 황희를 중용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에 따르면서 그렇게 황희는 세종을 도와 조선의 황금기를 이루어낸다...

 

 세종 때 근교 여진족이나 왜인, 아랍인들까지 많은 외국인들이 집단으로 귀화해왔고, 그 외국인들을 포용해주면서 명나라에서 긴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특히 그 당시 명나라는 어여의 난으로 드러난 영락제의 추문이 '조선의 어진 임금' 의 명성과 대조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는 중국 사신의 말도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드라마에서 보던 한영정의 딸 다연이 그 영락제의 후궁 중 한명이었으며, 결국 황제와 순장되었다는 안타까운 사건도 언급하고 있으니 세종대왕의 명성은 가히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듯 하다.

 

 또 태종, 세종 모두 황희에게 기대했던 것은 다양한 인재의 발굴이었고, 황희도 그에 상응하는 자취들을 남겼다. 허조 발탁, 영변부사로 최윤덕 추천, 안숭선을 지신사로 추천, 천출 출신 장영실을 호군으로 제수하는 등 적재적소에 좋은 인재들을 배치하는 등 국왕의 부응에 보답했다.

 

『실로 내 인생의 최대 반전은 '간악한 소인(조말생의 평)에서 '청렴한 정승'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태종과 세종의 인재를 가려내고 기르는, 그래서 공적에 의해서 허물을 극복하게 만드는 '살림의 정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음은 황희와 함께 세종의 정치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인 허조...

 

『허조는 세종시대 대부분의 인물들과 달리 부패나 스캔들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관리에 엄격했는데, 허기를 면할 정도의 식사에 만족했으며 여색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그는 자손들이 방만해질 것을 우려해 재산을 남겨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관은 그를 "밤낮으로 스스로를 경계한 인물" 로 평가했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스캔들 유감동명부 사건에서 허조의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그저 흔한 추문으로 불과했을 걸로 생각했던 사건이 그녀와 관계한 남자가 과거에 갓 급제한 자에서부터 의정부의 재상에 이르기까지, 현직 관료로부터 퇴직한 관료까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워질 정도로 커진 탓에 인재를 무더기로 잃을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하자 사건의 조사를 서둘러 마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사실 규명을 해서 얻는 이익보다는 그 손실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또 권채는 여종 덕금을 첩으로 삼았는데 이를 질투한 부인 정씨가 덕금을 인간돼지로 만들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난과 고통을 겪은 덕금은 '부민고소금지법' 때문에 자신의 주인을 고소할 수도 없었으나 세종이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라고는 하나 노비가 스스로 고소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알고 추핵한 것이니 이 법이 적용될 수는 없다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셨다 한다. 물론 권채와 그의 아내에 대한 처벌이 가볍게 이루어지긴 했으나 백성의 억울함과 유능한 관리를 보호하는 사이의 적절한 처벌은 이루어졌다고 허조는 보고 있다.

 

 세종대왕과 허조가 백성을 보는 관점은 차이가 있었으나 여러가지 법제나 인재를 쓰는 법 등은 놀랄만치 일치했었던 거 같다. 허물이 있어도 그 관직에 맞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면 중용했고, 믿고 맡기는 방식과 가치관이 같았던 것 같다.

 

『나는 한번도 이 나라의 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국가 일을 내 자신의 임무로 여기며" 살아왔다.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온 지금 나는 감히 "태평한 시대에 나서 호연히 부끄러울 것이 없다" 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결코 나의 조상들에게 있지 않았고, 또한 "나의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주상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자 '향(문종)'의 첫번째 세자빈 김씨는 세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민간요법이나 술법 등을 사용하면서 문제가 불거져 이를 주상이 조사하여 폐출시켰고, 두번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에 연루되었다. 그 전에 주상이 직접 내려준 열녀전을 내동댕이치고, 시녀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에 들락날락거리고, 밤에는 궁궐 여종들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거짓으로 임신했다고까지 했었으니 신뢰가 떨어진 상태에서 그 동성연애사건이 터진 것이다. 

 10년 안에 2번이나 폐출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폐출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주상의 마음에 드는 세자의 배필을 구할 수 없어 후궁을 승진시켜 세자빈을 삼았으나 결국 세번째 세자빈 권씨도 단종을 낳고 죽고 말았다.

 

 반면 세종은 노비 출신인 신빈 김씨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첫 아이를 낳은 후 후궁 중 최고 자리인 빈까지 승격시켰다. 소헌 왕후의 시중을 들고 있던 나인이었는데 후궁이 되고 나서도 소헌왕후는 신빈 김씨를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오히여 막내 영응대군의 양육을 맡기는 등 김씨를 신뢰하고 있었다.

 초토화된 처가를 생각해서인지 주상은 소헌왕후 심씨를 극진히 대하였고, 신빈 김씨와 사랑에 빠질 때도 다 중궁의 내조 덕분이라면서 왕후를 존중하고 아꼈기에 신빈 역시도 왕후를 질투하지 않고 존중했다.